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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경험담

제목 단주 치료 경험담(알코올 중독)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3.04.10 12:15:20 조회수 5697

 

술 마시는 소크라테스보다 살찐 돼지가 훌륭하다.

 

 

 * 아래 내용은 본원에 입원하신 어느 환우분의 치료경험담입니다. 각색없이 본인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니 참조하여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필름을 거꾸로 되돌려 지난 시간을 더듬어 기억하자니 무척 마음이 무겁다. 단주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후 수기를 몇 번 써 본 적이 있었다.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온 짧은 삶을 글로 적을 때, 다른 누군가는 나처럼 이렇게 미칠 듯이 회오리치는 묘한 기분을 느끼는 경험을 안 했으면 한다. 술문제가 있던 아버지와 우리 어머니 사이에 1남 2녀 중에 장남에 외아들로 경주 최씨 문중에 종손으로 나는 태어난다. 잔치를 아버지의 고향에서 한번, 대구에서 하였고, 몸이 약해 출생신고를 나중에 했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는 초등학교만 졸업하셨고, 전교 6명 중에 전교 1등을 했으며 술만 마시면 전교 1등 했다는 걸 소리쳐 상기시켰다. 일찍부터 가난에 찌든 아버지는 집을 떠나 14살 때부터 객지 생활을 하고, 군대에서 어머니와의 묘한 만남에서 태어난 나. 아버지의 아픔은 전교 1등을 한 그 명석한 아버지가 못 배운 공부와 가난에 억눌린 심정을 아들인 나에게 해소, 기대, 바램으로 나는 오로지 육군 사관학교나 서울대 법대만을 일방적인 본인 생각만으로 술에 취해 강요하였다. 억척같은 생존의식, 일 중독, 돈 중독. 결국, 손가락이 네 개씩 잘려나간 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에 손을 다쳐서 술을 못 마시고, 아파서 신음만 끙끙 내는데 여동생과 나는 이불 속에서 웃으면 그렇게 좋아했다. 몇 달이지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머니가 매 맞지 않고, 조용한 시간 우리는 너무나 평화스럽고, 편안했었다. 아버지가 술을 끊고 제발 어머니만 때리지 않았으면... . 차라리 죽어만 준다면... 하는 생각이었다. 객지에 일이 있어서 2~3달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면 어머니, 여동생 그리고 나는 8.15 광복 그 이상의 기쁨으로 큰 소리로 웃었으며 TV도 마음껏 보러 만화방과 이웃집에 갈 수 있어 좋았다.

한 살씩 나이를 먹으면서 몸은 커지고 근육이 굵어지면서 아버지를 내가 죽이는 상상을 매일 밤 하면서 혼자 좋아했었다. 수 없이 맞아서 코피가 나고, 새벽에 졸아가면서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항상 구두 발자국 소리는 신기하게 알아챌 수가 있었다. 동생과 나는 전구를 잽싸게 끄는 동시에 코를 골고 자는 척했고, 아버지가 세숫대야를 발로 차고 연탄재를 차도 코는 계속 골고 있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나는 아버지의 술주정, 폭언, 강요, 욕심, 모든 것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집을 나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버지가 무서워서 한때는 공부를 잘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항상 가슴속에는 아버지가 없어지길 원했다. 그런데 이런 내가 술 때문에 정신병원에 들어가 아버지께 전화했을 때 가뿐 숨소리가 나더니 '뚜뚜뚜...' 소리가 난 후 대답이 없었다. 술 먹는 아버지를 18살 때 발로 찼던 내가 아버지보다 더 심한 모습으로... 결국에는 이 글을 쓰자니 약간 흥분이 되는 이유를 모르겠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아버지를 피해 집 밖에 나갈 유일한 길이 교회였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통해 아버지를 없애주실 거라는 어리석은 믿음이 간절했다. 집구석은 마치 개판 같았지만, 교회에서는 항상 올바르고 잘난 멋쟁이로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친구들 앞에서 거짓과 위선 그리고 허풍으로 또는 여학생의 환심을 한몸에 받고 학생회 회장 그리고 총무를 연이어 하면서 마냥 교회 나가는게 가장 기뻤다. 교회 장로님의 딸 동갑내기와 철없는 연애를 7년간 했는데, 육군 수색대 강원도 비무장지대에 병장 시절. 어느 날 여자친구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그곳까지 찾아와서 우리의 연애를 반대했다. 장로님의 태도에 나는 분노, 울분... 그리고 그 여자는 내 곁을 떠났다. 12년간의 신앙생활은 본색이 드러나고 말았다. 아버지 때문에 술을 증오하고, 술 냄새조차 싫어했던 내가 그 여자와 헤어진 후 어느 날 소주를 마셨다. ‘와!와!이게 웬걸...’ 콜라보다는 소주가 내 몸에 크게 와 닿았다.

 

 충격이었다. 굿!너무 좋았다. 살아오면서 억눌리고 억압받던 심정. 말 못할 그 무엇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용기를 줄 수 있는 그것을 만났다. 소주였다. 내게는 딱이요. 캡틴. 마시면 또 마시고 싶고 콜라, 사이다보다는 싸게 느껴졌다. 모든 생활에서 용기와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 아버지가 술 문제가 있어서 어머니는 항상 나에게 미안해 하셨다. 아버지 때문에, 그리고 어머니 때문에 내가 술을 마신다고 어머니는 생각했었다. 그러다 보니 살아오는 내내 사고 뒤처리를 아버지 몰래 하셨다. 사고 치면 뛰어오고 돈 없으면 빌려서 주고, 술 먹고 욕하면 어머니는 항상 말 잘 듣는 애완견처럼 내 뜻대로 다 해주셨다. 집에서 독립한다고 들어간 회사에 나는 술 잘 마시는 남자, 잘 생기고 멋진 남자, 술의 절묘한 효과와 나의 치명적인 언변술의 힘을 빌린 용기가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는 불상사로 이어져 결국 본격적인 술 문제로 돌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아온 내가 결혼이라는 이상한 일을 책임 없이 시작하다 보니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폭음탄에 성냥불을 그은 꼴. 아내의 큰 오빠의 권유로 대구의 아파트 붐이 한참일 때 배관 일을 시작하고, 용접하고 온통 술꾼들로 내 인맥은 거의 나의 무대, 눈 뜨면 나의 세상, 나가면 술이고, 또 마실 기회는 계속 이어져 갔다. 처음부터 아내는 나의 술 문제를 알고는 교회에 나가며 나를 위해 기도했다. 나는 술에 취하여 교회 가는 가족을 괴롭히고 욕을 했다. 어느 날 아내는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 집에 오니 흰 눈동자, 입가에는 거품이...“오!오! 미친 X환장하겠네.” 무조건 업고 술기운에 달렸다. 술기운에 힘들어 인도에 눕히고, “미친 X아! 창피하게 곱게 죽지! 약을 쳐 먹냐?” 병원에 도착하니, “큰일 날 뻔 했어요.” 나는 복권에 숫자가 틀린 것만큼 그 소리가 싫었습니다. “차라리 죽지. 죽지...제발...” 큰 처남이 병원 식당에서 술 마시는 나를 찾아와 내 뒤통수를 때렸다. “너 사람이 맞아?” 그때 이미 나는 미쳐 있었고, 그런 와중에 남에게 지기는 싫었고, 일에는 욕심이 많아서 악착같이 기술을 익혔으며 처남에게 욕을 듣는 게 싫어 술을 마시고 사고를 쳤지만, 일만큼은 소문날 정도로 깔끔했다. 처남이 회사에 사장이 되면서 기술과장이 필요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여동생 신랑인 나를 많이 아껴주었다. 현장에서 술 마시고 폭력, 다른 일꾼과 사고, 공사 포기 각서 후 여관으로 잠수 등등 회사에 많은 손해를 끼쳤지만 그래도 처남은 날 감싸며 용서해주고 또 용서해주었다.

 

 술안주에 술상 준비하라고 했는데 집에 오니 아무도 없었다. 라면박스에 병아리 몇 마리가 보였다. 주먹으로 다 터트려 벽에 발랐다. 피와 털, 내장, 머리가 각각 벽에 붙였다. 수석 돌로 수족관 어항을 쳤다. 그 많은 물과 자갈, 열대어 수 십 마리가 큰 방 속에서 엉망으로 되었으며 유리파편이 다리에 찔려 술김에도 상처가 찌릿찌릿했다. 눈을 뜨니 밀려오는 불안, 온통 난장판이 되었으며 엉망진창 생각할 틈이 없었다. 나가서 술을 또 마셨다.

집안에 아버지 체면에 자동차를 사서 한 달만에 술 마신 후 사고 치고, 그냥 뺑소니를 쳤다. 차는 엉망이 되었고, 또 술로 인해 사고는 줄줄이 계속 이어지고, 처남이 많은 돈을 벌 동안 나는 수많은 돈을 까먹고, 물어주고 다쳐야 했다. 그 착하던 아내는 어느 날 내가 욕하면 같이 욕을 하기 시작했다. 아내의 그런 태도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매 순간 두렵고 불안했다. 나와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했고, 술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 하나하나가 비참했다. 어떤 일에도 남의 욕이나 흠 잡히는 걸 무척 싫어했고, 우월감과 독선이 강했기에 기억이 안 나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결국 심한 갈등과 불화로 이어져 결국 나 스스로 술 문제를 조금은 알아채고 절주하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수지침, 운동요법, 한약, 보호자 승낙으로 알콜스톱 알약까지 2주를 못넘기고, 결국 무기력증, 나 스스로 모든 것에 대한 자신감은 저하되어 갔다. 심지어 술을 감추고 동네 차 뒤에 숨어서 먹고, 아내 지갑에 손을 대고 애들 용돈이며 장롱의 옷을 수십 번 뒤지기 시작하면서 극도로 심해지는 술에 대한 집착 현상. 아내와의 갈등은 대화 단절로, 무관심으로 오랜 시간이 가고 있을 때쯤 아내는 어느 날 나에게 집을 나가 달라고 단호히 말을 했다. 길거리 노숙을 결심한 후 잽싸게 나와 몇 푼의 돈으로 의기양양 술집으로 나는 향했다. 쿨 하게 안주 한 사라를 시킨 후 소주 한 병, 두 병 여러병 결국 기억을 잃고, 으슬으슬 추워 약간의 정신을 차릴 때쯤 집 앞 대문이었다. 동네 개도 내 옆에서 쳐다보며 비웃는 듯했다. 연이어 말 없는 가족 틈에서 나는 나를 속이며 애써 반성하는 듯 고민에 빠져 자숙했다. “송이 아빠! 내일 나와. 갈 때가 있어.” 나는 속으로 올 것이 왔구나. 순간 강한 전율이 나를 애워 쌓았다. 알코올 상담센터. 술에 취해 친구들과 맛있는 술을 만들고자 국가에서 따로 알코올 농도 측정과 술을 연구하는 기관이 알코올센터라고 떠들고는 했는데. 나는 그곳을 아내와 찾아갔고 그곳에서 확실한 내 병을 확인한 후 필할 길이 없었던 정신병원 치료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다.

 

 3개월 병원 생활 동안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다짐했다. 곧바로 AA라는 단주 모임에 참석했고,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하루하루 새로운 삶을 꿈꾸며 나는 기쁨을 만끽했다. 그러나 아내와 아이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함께 서로 회복하고 기뻐야 하는데 오직 모임에 집중하며 전국 모임 행사로 병원 메시지, 외래 치료, 교육으로 돌아다니면서 힘든 아내의 마음과 아이들을 챙기지 못한 채 단지 어울리며 안 마시는 일에만 만족했던 게 결국 또 다른 불화, 갈등 요소였다. 아내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시간이 결국 새로운 한 여성멤버에게 후원하고 돕는다는 이유로 결국 사건이 되었고, 서로의 가족들에게 발각되어 그 죄책감에 재입원을 하게 되었다.

 

 27개월 동안의 꿈만 같은 모임의 열정, 대표 봉사자로서 열망을 가지고 뛰며 어울린 시간들, 다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9개월간 병원 생활에 다시 들어가면서 철저하게 나 자신을 다시 보게 되고, 12단계를 공부한 것을 가슴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또한 뜨거워지면서 한이 없는 영적인 변화로 드디어 퇴원 후 집으로 갔으나 아내와의 심한 갈등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자식 그리고 아내가 원하는 것이 분명 내가 가족들 곁에서 없는 거라면 억지로 내 고집만 앞세우지 말고 우선 받아들이자고 결심했다. 딸아이가 대학 입시로 예민했기에, 이 또한 사랑이라 여기고 집을 나와 청도 요셉의 집 하나님을 믿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생활했다. 그 추운 겨울 오토바이를 타고 구두를 닦으며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고, 골목에서 컵라면을 쪼그려 먹으며 오직 신앙, 믿음으로 10개월을 보냈다. 다시 집으로 왔으나 그래도 나가라고 온 가족이 나에게 말을 했다. 갈 곳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12단계 교육을 하며 오랜 단주 생활을 하신 친분 있는 선생님의 도움으로 지금의 열린 병원을 오게 되었다. 몇 번을 죽으려고 산에서 제초제를 마시려 하고, 오토바이로 다리에 뛰어 내리려 하고, 그 많은 사고에도 나를 살려 두시는 하나님의 뜻을 병원에 와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임을 나는 알았다. 이곳은 내가 태어난 곳,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는 곳이다. 내가 사고치고, 공사 도중에 포기한 건물이 보이는 열린마음 열린병원으로 나를 오게끔 하신 하나님의 뜻을 나는 여기서 반드시 내 마지막 회복의 통로로 하나님이 삶을 만들고 계획하심을 알고 느끼게 되었다.

현재 17개월. 한 번도 입에는 술을 넘기지 않고 있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내는 못 봤지만, 가족이 원하는 일을 들어주는 것도 사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삶에 있어서 술은 신앙이고, 종교행사였다. 술은 나의 위로, 고민의 해결책이었으며 피난처, 활력소였다.

 

 하지만 현재 나는 이곳에서 모든 욕망과 욕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교회봉사 그리고 전도, 영적 멘토인 목사님, 센터와 몇몇의 협심자. 예전에 알고 지내던 전국에 계시는 몇몇 선생님들. 새벽에 항상 나를 위해 기도하는 영적 어머니와 권사님 등 이런 분들의 도움으로 항상 매일매일 나 자신의 잘못된 그것을 매 순간 알아나가며 회복하고 있다. 12단계를 원장님이 직접 교육하는 지금의 이 시간은 나에게 또 다른 큰 감사이다.

아내와 아이들이 나를 가족으로 다시 받아주지 않아도 좌절하거나 힘들어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변하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할 수만 있고, 또 노력한다면 반드시 화목한 가정이 선물로 다시 내게 펼쳐질 거라고 조심스럽게 믿는다. 두서없는 이 글이 부끄럽고 죄송하지만,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부끄러운 내 삶을 적으며 다시 한 번 각성이 된다. 이 글이 절망에서 희망으로 가는 글이 되었으면 한다. 술 문제가 없는 대한민국이 되는 그날까지 나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 것이며, 첫 잔을 피하고 오직 그분의 뜻을 알아 겸손하고, 정직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분들 그리고 AA대구 연합과 열린마음열린병원(현 위드병원)원장님, 더 노력해서 온전히 살아가는 그 순간까지 겸손히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사랑합니다. 회복하는 모든 선생님들 손을 잡고 함께 창공 날아 봅시다. 극동방송의 이혜진 아나운서와 또 열린마음열린병원(현 위드병원)원장님 처음 갈 곳 없는 나를 이곳으로 안내해주신 윤 선생님. 2006년부터 늘 한결 같이 사랑해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 술 마시는 소크라테스보다 살찐 돼지가 훌륭하다.

* 술은 내 삶의 스승이다.

 

 아버지의 노환은 심하고, 어머니는 심한 우울증에 정신과 약을 드시며 여동생의 결혼식도 참석 못하고, 얼굴도 못 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아내도, 대학 간 딸도, 많이 자란 아들도 무척 보고 싶다. 후회하지는 않는다. 개 같은 예전의 삶에서 지금은 약간의 생각과 태도가 달라져 홀로 서기에 전념해간다. AA모임의 12단계를 매일 조금씩 실천하고, 신앙 안에 봉사하는 곳에 내 몸을 두며 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에 감사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오늘은 선물이며 내일은 축복이다.” 그냥 오늘에 최선을 다한다. 나보다도 힘든 사람과 주위에 아픈 사람들을 바라보며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일을 그분께 열어 달라고 기도하며 조금씩 다가가는 중이다. 죄 많은 삶, 부끄러운 삶에서 희망을 전하는 삶으로 살아갈 것이다. 사람의 기쁨이 오직 내가 믿는 신앙 안에서 가진 게 없어도 감사와 기쁨으로 살고 싶다. 술 없는 하루를 사는 게 내 인생의 가장 큰 사업이고, 삶의 큰 의미이다. 모두 모두 사랑합니다.

 

 

 

Comment

 

 본 환우의 경우, 입원 초기에는 가족 내 갈등(특히 부부간 문제)으로 입원치료의 동기가 치료 재활보다는 일종의 도피처(?)로서가 의미가 큰 것으로 보였습니다. 또한, 단주 동기가 낮게 관찰되었는데. 비록 1회였지만 입원 초기 만취 상태에 이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방병동 생활을 유지하면서 치료/재뢀프로그램에 꾸준히 참여하고, 단주 모임에 회복 중인 환우들과 함께하면서부터 눈에 띄게 안정되는 모습이 관찰되었고, 현재까지 재발 없이 병동생활을 유지 하며 간헐적으로 일도 하는 상태입니다.

 앞으로도 지역사회 내에서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복귀하기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하며 실천해 나갈 것으로 사료됩니다.

 

 

위드병원장 주치의 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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